카이카이 카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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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카이 카일러는 1898년 미시간주에서 태어난 미국의 야구 선수로, 외야수로 활약했다. 1921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1924년 주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1925년에는 144득점으로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시카고 컵스, 신시내티 레즈,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통산 3할대 타율과 30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했다. 196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5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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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카이 카일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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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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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Hazen Shirley Cuyler |
애칭 | Kiki |
출생일 | 1898년 8월 30일 |
출생지 | 미국 미시간주 해리스빌 |
사망일 | 1950년 2월 11일 |
사망지 |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 |
신장 | 178cm |
체중 | 81kg |
타격 | 우타 |
투구 | 우투 |
포지션 | 우익수 |
선수 경력 | |
메이저 리그 데뷔 | 1921년 9월 29일 |
메이저 리그 마지막 경기 | 1938년 9월 14일 |
소속팀 | 피츠버그 파이리츠 (1921–1927) 시카고 컵스 (1928–1935) 신시내티 레즈 (1935–1937) 브루클린 다저스 (1938)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선정 | 1934년 |
월드 시리즈 우승 | 1925년 |
내셔널 리그 도루왕 | 1926년, 1928년, 1929년, 1930년 (4회) |
시카고 컵스 명예의 전당 헌액 | 해당사항 없음 |
명예의 전당 헌액 | 1968년 (베테랑 위원회) |
통계 (MLB) | |
타율 | 0.321 |
안타 | 2299 |
홈런 | 128 |
타점 | 1065 |
2. 어린 시절
카이카이 카일러는 1898년 8월 30일 미국 미시간주 해리스빌에서 조지와 애나 카일러의 아들로 태어났다.[48][50][1][3] 그의 부모는 캐나다 출신으로, 아버지 조지는 캐나다에서 세미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조지와 애나의 윗 세대들은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할 때 캐나다로 이주했다가,[4] 1880년대에 미시간주로 다시 옮겨갔다.[5] 카일러는 학창 시절 야구, 미식축구, 농구, 육상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지 않는 등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5]
1921년 9월 미시간-온타리오 주 리그의 베이시티 구단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승격되었다. 처음 3년 동안은 거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나, 4년째인 1924년에 11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54, 165안타, 32도루의 활약을 펼치며 파이리츠의 주전 외야수가 되었고, 같은 해 MVP 후보에도 올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웨스트포인트에 3개월 있다가[53][6] 미시간주 플린트로 돌아와 뷰익 조립 공장에서 일했다.[7] 카일러는 플린트와 디트로이트에서 경기를 치르는 인더스트리얼 리그에서뿐만 아니라 뷰익 공장 야구팀에서도 뛰었다.[8]
3. 선수 경력
다음 해인 1925년, 카일러는 타고난 발 빠른 속도와 뛰어난 타격을 발휘했다. 이 해의 144득점은 리그 최다를 기록했고, 41도루는 전년에 이어 리그 2위, 타율 0.357, 안타 220개를 기록했으며, 타점도 100타점을 넘어서 승부 근성도 발휘했다. 8월 28일 필리스전에서는, 당시 좁기로 유명했던 베이커 볼에서 2개의 런닝 홈런을 쳤다. 같은 해 출전한 월드 시리즈에서는 6타점을 올려 파이리츠의 시리즈 제패에 기여했고, 리그 MVP 투표에서는 2위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26년에는 2년 연속 최다 득점을 기록했고, 개인 첫 도루왕이 되었지만, 1927년 시즌 오프에 파이리츠에서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컵스 이적 후 1928년 시즌에는 타율 3할을 넘지 못했지만, 37도루로 두 번째 도루왕이 되었다. 1929년과 1930년에는 "100득점, 100타점, 30도루"를 2년 연속 기록했으며, 전년도와 합쳐 3년 연속 도루왕이 되었다.
시카고에서 1935년까지 재적 후, 시즌 도중에 레즈로 이적, 1938년에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현역에서 은퇴했다. 다음 해부터 마이너 리그 코치를 맡은 후, 1941년부터 3년 동안은 코치로서 컵스에 복귀했다. 마지막으로 메이저 리그에 관여한 것은 1949년 레드삭스였으며, 다음 해인 1950년 51세의 나이로 미시간 주에서 사망했다. 1968년, 베테랑 위원회에 의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 선수로 선정되었다. 카일러는 메이저 리그에서 시즌 25개 이상의 3루타를 기록한 마지막 타자가 되었다.
3. 1. 피츠버그 파이리츠 (1921-1927)
카일러는 1920년 마이너 리그 베이시티 울브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21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주로 마이너 리그에서 뛰었으나, 1923년 서던 어소시에이션의 내슈빌 볼스에서 .340의 타율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1924년부터 주전 외야수로 자리 잡았다.[59]
'카이카이(Kiki)'라는 별명은 그의 성(Cuyler)을 발음할 때 더듬는 버릇에서 유래했다는 설과,[58] 외야 뜬공을 처리할 때 동료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24년 8월 9일 경기에서는 3개의 2루타와 한 개의 3루타를 포함해 6안타를 쳐내며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팀의 16–4 대승에 기여했다.[60] 1925년 6월 4일에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63][64] 8월에는 베이커 보올에서 2개의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했다.[65] 9월 18일부터 20일까지는 10타수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1925년에는 타율 .357, 144득점(리그 1위), 26 3루타(리그 1위), 41도루(리그 2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50] 1925년 월드 시리즈에서 7차전 결승타를 포함, 맹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26년에는 폴 워너가 합류하면서 중견수와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겼다. 113득점(리그 1위), 35도루(리그 1위)를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지만,[50] 시즌 중반 프레드 클라크 부사장의 경기장 출입 금지 찬반 투표 사건 이후 .288의 타율로 부진했다.[48]
1927년 시즌에는 감독 도니 부시와의 불화로 인해[72] 벤치를 지키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시즌 후 스파키 애덤스, 피트 스콧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시카고 컵스로 이적했다.[76]
3. 2. 시카고 컵스 (1928-1935)
카일러는 시카고 컵스에서 주로 3번 타순을 맡았고, 원래 포지션인 우익수로 뛰었다. 1928년, 발목 부상에도 불구하고[48] 37도루(리그 1위)를 기록하며 통산 두 번째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같은 해, 클리프 히스코트, 개비 하트넷, 핵 윌슨과 함께 사중창단을 결성하기도 했다.[77] 1929년, 건강을 회복한 카일러는 타율 .360, 43도루(리그 1위)를 기록하며 1926년 이후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50] 1929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시카고 컵스는 1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78]
1930년, 카일러는 228안타, 155득점, 134타점(모두 커리어 하이)을 기록하고, 37도루(리그 1위)로 통산 네 번째이자 마지막 도루왕을 차지했다.[50] 핵 윌슨이 191타점으로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지만, 컵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2경기 뒤진 2위를 기록했다. 1931년, 카일러는 202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세 번째로 200안타 이상을 기록했다. 1932년, 1루 베이스를 돌다 왼발 발가락 골절상을 입어 6주간 결장했다.[48][79][80] 8월 31일,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9회말 동점타와 10회말 역전 끝내기 홈런을 포함해 6타수 5안타 5타점을 기록하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80][81]
1933년 시범 경기 중, 도루 시도 중 종아리뼈가 골절되는 부상[48][72][80]으로 7월까지 결장했다. 1934년, 건강을 회복한 카일러는 타율 .338, 42 2루타(리그 1위)를 기록했다.[50] 1935년, 시즌 중 부진으로 인해 컵스에서 방출되었다.[82] 이후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다.
3. 3. 신시내티 레즈 (1935-1937)
카이카이 카일러는 1935년 시즌 전반기 부진(타율 0.268) 이후 컵스에서 방출되었다.[1][3] 자유 계약 선수로서 1935년 7월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다.[3] 레즈에서의 첫 번째 풀 시즌은 생산적이었고, 1936년 144경기에서 타율 0.326, 185안타를 기록했다. 그 해 그의 16개의 도루는 1930년 37개로 리그를 이끈 이후 가장 많은 기록이었다. 또 다른 골절, 이번에는 광대뼈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발생했고, 1937년 시즌은 117경기로 제한[35]되었는데, 그는 11경기에 출전했던 1923년 이후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 1937년 10월 레즈에서 방출된 후,[35] 그는 시즌 말에 야구 은퇴를 결정했다.[1]
3. 4. 브루클린 다저스 (1938)
카이카이 카일러는 내셔널 리그에서 최고령 선수로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다.[3] 1938년 다저스에서 58경기에 출전했고,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다.[1] 그해 9월 16일에 다저스에서 방출되었고, 시즌 나머지 기간 동안 코치로 계약했다.[1]
4. 은퇴 이후
카일러는 선수 은퇴 후 마이너 리그 팀의 감독을 맡았다. 1939년 조 엥겔 휘하에서 채터누가 룩아웃츠의 감독을 맡아 서던 어소시에이션 정규 시즌 우승을 이끌었다.[84] 시카고 컵스(1941~1943)와 보스턴 레드삭스(1949)에서 코치를 맡았으며,[84] 1950년 시즌을 앞두고 보스턴의 3루 코치로 임명되었다.[84]
하지만 1950년 2월 2일 미시간주 글레니에서 얼음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 마비를 일으켰다.[85]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다리에 혈전이 발생했고,[48][1] 상태가 악화하여 2월 11일 미시간주 앤아버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사망했다.[86][38] 시신은 미시간주 해리스빌타운십에 있는 세인트 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87]
카일러는 야구 선수 중에서도 예의 바르면서 수줍음이 많고 친절한 선수로 유명했다. 조 크로닌은 "내가 야구계에서 만난 가장 훌륭하고 깨끗한 동료 중 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1925년에 파이리츠에 합류했을 때 카일러는 인정받는 선수였지만 언제나 기꺼이 도와주었어요."라고 말했다.[91] 《스포팅 뉴스》에서는 "경기장 안팎에서 모범이 되는 선수"라고 일컬었다.[92] 카일러는 1968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8][1]
카일러의 아들 해럴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해리스빌에서 '카이 카일러의 바 앤드 그릴'(Ki Cuyler's Bar & Grill)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열어 한동안 소유 및 운영했다.[93] 음식점은 2018년 12월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운영되었다.[94][46] 2008년, 주립 고속도로 M-72의 일부 중 미시간주 앨코나군에 포함되는 도로는 '헤이즌 셜리 '카이카이' 카일러 메모리얼 하이웨이'(Hazen Shirley 'Kiki' Cuyler Memorial Highway)라고 명명되었다.[93]
5. 사망
카일러는 선수 은퇴 후 마이너 리그 팀의 감독을 맡았다. 1939년 시즌에는 조 엥겔 휘하에서 채터누가 룩아웃츠의 감독을 맡아 서던 어소시에이션 정규 시즌 페넌트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후 시카고 컵스(1941~1943)와 보스턴 레드삭스(1949)에서 코치를 맡았다. 1950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보스턴의 3루 코치를 맡기로 했으나,[84] 그해 2월 2일 미시간주 글레니에서 얼음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 마비가 일어났다.[85] 이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다리에 혈전이 발생했고,[48] 상태가 악화되어 1950년 2월 11일 미시간주 앤아버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사망했다.[86] 그의 유해는 미시간주 해리스빌타운십에 있는 세인트 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87]
6. 유산 및 평가
카이카이 카일러는 통산 .321의 타율과 2,299안타, 394개의 2루타, 157개의 3루타, 128홈런, 1,065타점, 328도루를 기록했다.[50] 세 시즌에서 2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했고, 두 번 득점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했다.[88] 1930년 시즌에는 228안타와 155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시카고 컵스 구단 역사상 각 부문 2위의 기록이다.[89] 또한 같은 해 기록한 50개의 2루타는 당시 팀 최다 기록이었다.[89]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기록한 통산 타율 .336는 역대 3위이며, 1925년 시즌의 220안타는 당시 피츠버그 선수로서는 단일 시즌 최다 안타 타이기록이었다.[90] 메이저 리그에서 10회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50]
카일러는 경기장 안팎에서 모범적인 선수로 칭송받았다.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조 크로닌은 "내가 야구계에서 만난 가장 훌륭하고 깨끗한 동료 중 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1925년에 파이리츠에 합류했을 때 카일러는 인정받는 선수였지만 언제나 기꺼이 도와주었어요."라고 회고했다.[91] 《스포팅 뉴스》는 "경기장 안팎에서 모범이 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92] 1968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8]
미시간주 해리스빌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도로명을 '헤이즌 셜리 '카이카이' 카일러 메모리얼 하이웨이'로 명명했다.[93] 그의 아들 해럴드는 '카이 카일러의 바 앤드 그릴'을 운영했으나, 2018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었다.[93][94]
7. 통산 기록
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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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점
타
루
타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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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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